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레카레드 2세]], [[수인틸라]], [[시세난드]], [[친틸라]], [[툴가]] ==== 621년 시세부트 왕이 사망한 뒤, 아들 '''[[레카레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3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시세부트의 부관이었던 '''[[수인틸라]]'''가 왕위에 올랐다. 역사가 베르나르드 배크라치는 수인틸라가 어린 왕을 살해했으며, 시세부트의 박해에 원한을 품은 유대인들이 수인틸라를 지원했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Hispania_700_AD.png]] 수인틸라는 즉위 직후 동로마 제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감행했다. 2명의 동로마 총독을 사로잡는 등 맹렬한 공세를 벌인 끝에, 625년경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동로마 요새인 카르타헤나가 함락되었고, 발렌시아에서 카디스까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지대가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이베리아 전역을 통치한 최초의 왕이라고 밝혔다. 다만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와 [[발레아레스 제도]]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한편, 그의 통치 초기에 [[바스크]]인들이 서고트 왕국 북쪽 지대를 습격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이들을 상대로 공세를 벌인 끝에 바스크인들이 자신의 권력에 복종하고 인질을 바치게 했다. 이후 바스크인들의 재침을 막기 위해 올리타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속 귀족과 고위 성직자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 그는 후계를 미리 정하기로 하고, 어린 아들 레키메르를 공동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레키메르가 요절해버리면서, 후계 구도를 굳히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귀족의 권리를 축소하려는 그의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프랑크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수인틸라가 동료들에게 매우 무례했고 왕국의 모든 고귀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라고 기록했다. 한편, 그는 시세부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지속했지만 강도를 어느정도 누그러뜨렸기 때문에 해외로 망명한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631년, [[시세난드]]가 이끄는 귀족들이 수인틸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접시는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프랑크 왕 [[다고베르 1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그는 폐위되었지만, 시세난드는 그를 죽이지 않고 2년간 감옥에 가두었다가 자신의 왕위가 공고해지자 먼 곳으로 유배보냈다.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 1세는 약속한 접시를 받기 위해 '''[[시세난드]]'''에게 사절을 보냈다. 시세난드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그라나다, 메리다 일대에서 [[유딜라]]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톨레도 교회에서도 새 정권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오간 끝에 갈라디 대주교가 인근 수도원으로 은퇴한 사건이 벌어졌다. 뒤이어 대주교를 밑은 유스투스는 왕의 지원을 받은 장로 게론티우스와 정쟁을 벌였다. 이렇듯 안팎으로 갈등이 벌어졌지만,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시세난드를 지지하자, 명망높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이 순응하면서 교회의 분란은 잦아들었다. 633년 12월 5일,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의장을 맡고 나르본과 이베리아 전역에서 온 66명의 주교가 참여한 제4차 톨레도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전 왕 수인틸라의 '악행'을 폭로하고 시세난드의 왕위 계승을 확정했으며, 수인틸라를 먼 곳으로 유배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또한 공의회는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노리거나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한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기로 결의했으며, 그에게 대적한 사제들은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수도원으로 물러가야 했으며, 외국 교회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은 것 역시 금지되었다. 시세난드는 온건한 군주로서 정당하고 경건하게 통치할 것을 약속했으며, 세습을 포기하고 왕위 계승을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밝혔다. 이 공의회가 631년 시세난드가 왕위를 장악한 직후가 아니라 2년 후에야 소집된 것은 633년에 유딜라의 봉기를 진압한 것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세난드는 교회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직자들의 모든 세금을 폐지했다. 공의회는 [[시세부트]] 왕으로부터 개시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재확인하고, 유대인이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세례를 받은 유대인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어야 하며, 세례받은 유대인들이 유대교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려갔고, 기독교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자는 공개 채찍질을 당했다. 유대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법령을 집행하지 않는 자는 세속인이든 성직자이든 상관없이 [[파문]]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인받은 시세난드는 636년 3월 12일에 사망했고, [[친틸라]]가 귀족과 주교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636년 6월 30일에 소집된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왕이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은 차기 왕이 상속자들로부터 몰수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또한 왕의 측근과 지지자, 고문 및 측근들은 왕이 죽은 뒤에도 왕이 하사한 선물을 그대로 가질 수 있었으며, 왕의 가족과 친구들의 재산을 침해한 죄를 지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출된 왕은 반드시 귀족 출신이어야 하며, 성직가, 노동자, 외국인 중에서 선택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엔 갈리아 나르본에서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참석하지 않은 주교가 많았기에 권위가 떨어졌다. 이에 638년 1월 9일, 제6차 톨레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나르본에서 3명의 주교가 참석했으며, 이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베리아 주교들도 대거 참여했다. 공의회는 교회 조직에 손을 대는 한편, 살해된 왕의 후계자는 왕을 죽인 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포고했다. 여기에 외국으로 망명한 뒤 서고트 왕국에 해를 끼치거나 특정 범죄의 피고인이나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은 파문되었다. 아울러 가톨릭을 따르지 않는 비기독교인의 국내 거주를 금지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추방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민중 앞에서 회심을 밝히는 것을 의무화했다. 두 공의회에서 결정한 사안을 볼 때, 친틸라는 왕위를 찬탈당하고 가족이 박해당할까 두려워했던 듯하다. 공의회를 통해 왕위를 보장받은 덕분인지 3년 6개월 만인 639년 12월 20일에 자연사했고, 아들 '''[[툴가]]'''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익명의 [[알안달루스]] 무슬림 역사가가 기술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착하고 고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642년, 고트족 귀족들은 79세의 친다수윈트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프랑크 왕국]]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고트족들이 나라를 확고하게 통치하지 못하는 왕을 불안하다 못해 많은 고위 관료와 여러 주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친다수윈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반란은 [[바스크]]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어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1세기의 신학자이자 역사가 젬블루스의 시게베르트에 따르면, 친다수윈트는 톨레도로 진군해 툴가를 붙잡아 삭발시킨 후 수도원으로 보내버렸으며, 이후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톨레도의 일데폰스는 친다수윈트가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지만 주교들의 승인이 없었기 때문에 반란군으로 남았다가, 툴가가 가까스로 왕위를 지키다가 사망한 후에야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쪽이 사실에 근접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